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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집합되어있는 기억의 입자들

전기숙 2011. 8. 22. 20:51


집합되어 있는 기억의 입자들

 

이선영 (미술평론가)

 

6월에 열린 2인 전 ‘망설이는 풍경’에 전시된 작품을 비롯하여, 근 2-3년 간 전시회나 오픈스튜디오 등에서 발표된 전기숙의 작품 기조를 이루는 것은 기억이다. 30대 중반으로, 추억과 향수에 젖어들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골에 살다가 대학 때 서울로 유학을 온 경험은 현대 도시인이 가지기 힘든 고향의 기억이라는 것을 남겼고, 성인이 된 후에도 숱한 여행을 통해, 사진이나 작품으로 보고 느끼고 겪었던 일을 추체험하는 것은 생활이 되었다. 교통수단과 레저 산업의 발달로, 시공간의 급격한 전환이 낳는 느낌은 심미적 체험과 깊이 연결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예술적 과정과도 겹쳐질 수 있는 거리두기를 체험하기 위해 그토록 여행을 다닌다. 그리고 대중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그들이 접하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든 현대 예술 보다는 여행을 통해 얻는 심미적 체험들이 더 직접적이다. 많은 이에게 여행은 예술을 대신 하는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대중과 소통하려는 현대의 작가는 작품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여행을 가능하게 해야 할 것이다. 작품이나 작업은 여행처럼 지금 여기를 떠남으로서, 지금 여기를 다시금 조명하며, 더 나아가 지금 여기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고루한 일상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썰렁한 작품들은 작가가 그 안에 심어놓았을지 모르는 심오하고 난해한 관념이 관객에게 읽혀질 어떤 계기도 마련하지 못하기에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굳이 어떤 이국적인 곳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업무나 반복적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단지 시간을 무익하게 보낼 수 있는 사실 자체만으로 ‘예술적인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 셈이다. 사진과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된 전기숙의 풍경은 개인적인 체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기억이 매체나 그림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직접적 체험보다 매체화 된 체험이 더 익숙해진 대중들에게 공유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전기숙은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2003년경부터 사진으로 하루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멋진 풍경을 보았을 때 카메라부터 들이대거나, 심지어는 차려진 음식을 먹기 전에 그것을 찍어 두는 것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사진은 실제 경험을 대신하는 중요한 증거들이 되곤 한다. 날짜별로 분류되어 컴퓨터 저장 공간에 빼곡이 들어찬 시공간의 단면들은 현실과 관계는 있지만, 정확한 현실이라고 할 수 없는 기억의 단편들이다.

작가는 ‘사진을 단서로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내러티브를 형성했다가 다시 해체되기도 했다’고 하며, ‘찍힌 사진 데이터의 날짜는 분명 과거의 기록임을 말하지만’, ‘사진으로 찍혔던 최초의 순간과 사진 이미지를 통해 회상된 기억들 사이의 간극은 꽤나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여행이나 사진 찍기가 일상화된 경험을 통해, 의식 속에서 잊혀졌던 고향의 시공간이 다시금 떠오르게 된다. 어릴 적에는 지금만큼 사진이 흔하지 않아서 그 간극은 더욱 클 것이다. 이후에 수많은 사진이 찍혀지지만, 작품으로 남는 것은 비록 스냅사진일지라도 어떤 원초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전기숙이 활용하는 사진은 데자뷰 현상이 있다. 컴퓨터에 정리된 사진 중에서도 ‘에피소드들이 한두 가지 이상 연상되는 사진을 변형시켜’ 작품에 사용한다. ‘망설이는 풍경’은 현재와 과거가 중첩되면서 불확실해지는 흩어진 풍경을 표현하는 말이다. 현실 뿐 아니라, 과거도 의심스러워지는 경우가 있다. 그 때 그 일이 진짜 나에게 일어난 것인가. 시공간의 단편인 사진으로부터 출발하는 전기숙의 작품은 또 다른 시선에 의해 해체되어 있다.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육각형 구조는 초파리 같은 곤충의 겹눈으로 필터링 된 것으로, 주어진 시공간을 낯설게 하는 장치이다. 사각형 또는 원형의 캔버스 작품 내에 육각형 구조가 있기도 하고, 아예 캔버스 자체를 육각형으로 짜서 풍경을 집어넣어 설치한 경우도 있다. 그것은 ‘미묘하게 변질된 기억의 부분’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한 부분씩 육각구조 속에 촘촘히 들어앉은 사진의 조각들은 마치 부분 부분 파편화되었던 기억들’과 관련된다. 작업과 중첩되는 기억의 과정은 분리된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추는 게임이 된다. 올 6월 종로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 출품된 가장 큰 작품은 소복이 쌓인 눈밭에 소나무들이 있는 한적한 풍경인데, 곤충의 겹눈으로 본 것같이 육각형 캔버스들로 분해되어 있다. 그것은 현재의 풍경 같기도 하지만, 늘 솔담배를 피우시던 할아버지를 기억한 풍경이다. 같은 형식으로 다리가 나오는 풍경 역시 막내인 자신을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놀림을 상기한 것이다. 바닷가에서 노는 소녀를 찍은 사진은 삼천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모습과 중첩된다. 관훈 갤러리의 한 귀퉁이에 있는 소화기 사진은 어릴 때 다니던 의원건물을 연상시킨다.

미국과 영국에 살고 있는 언니나 오빠를 방문하면서 찍은 풍경은 성인이 되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인간관계를 표현한다. 눈 쌓인 공항풍경은 늘 여기에서 저기로 뿌리 없이 이동하는 현대인에게 시공간의 간극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장소로 나타난다. 2009-10년에 제작된 유화 ‘냉동된 기억’ 시리즈는 제목에 사진이 찍힌 날짜가 병기되어 있다. [냉동된 기억-2009년 8월 8일-섬 소녀](2009)는 자신과 감정이입 되는 섬소녀의 모습을 육각형 렌즈로 분해하듯이 표현하였고, 작품 [냉동된 기억-2006년 12월17일-여의도](2010)는 기하학적 구조를 통과한 도시 풍경이다. 흐릿하게 전체 풍경이 있으면서도 나뉘어진 육각형 안에 작은 풍경들이 소우주처럼 자리한다. 작품 [2006년12월 30일–아쿠아리움](2009)은 수족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표현한 것인데, 수족관과 사람이 분해되면서 다시 합쳐진다. 사람 위에 떠 있는 몽환적 풍경은 상상처럼 펼쳐진다. 작품 [냉동된 기억-2006년 8월1일-런던 아이](2009)는 광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작동하는 놀이기구를 보여준다. 그것은 장소의 기념비성을 표현하면서, 그 오락이 주었을 아찔한 체험을 재생한다.

50cmx50cm 크기로 만들어진 둥근 캔버스 안에 육각형으로 나뉜 풍경은 국내외의 여행지에서의 체험을 마치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포착한 듯, 분석적이면서도 종합적인 비전으로 보여준다. 육각형으로 분해된 풍경들은 시공간적인 거리감을 가지는 체험들의 전후 관계를 복구해 보려는 불가능한 기획들이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는 정확하지만, 늘 상 전체적 맥락이 불확실하다. 육각형 사이의 간극들은 잃어버린 시공간에 내재된 균열들이다. 이 균열 속에서 작가나 관객은 길을 잃는다. 그것은 벤야민이 유년의 도시를 회상할 때처럼, ‘기억의 미로에 서있는 거리의 산책자’(그램 질로크)의 시점을 가진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유년시절의 도시를 더듬는 벤야민에게, 과거는 끝이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성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고 현재 속에서 변형되는 대상이었다고 지적한다. 전기숙의 작품에서 분열적 비전 속에 내재된 불확정성은 과거나 현재를 넘어서 미지의 시공간으로 연장된다. 어린 시절을 비롯하여 기억이란 결코 안전한 기원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완전한 회복도 불가능하다. 작품을 통해 불러낸 것들은 완전한 회귀나 회복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한 듯 하지만 낯설어진 풍경들은 스스로에조차도 이방인이 되는 시점을 표현한다.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아이의 시점이 보존됨으로서 거리를 둔다. 도시를 비롯한 여러 장소들과 기억은 서로 침투한다. 장소는 기억에 의해, 기억은 장소에 의해 조금씩 변형된다. 기억과 장소는 변형을 위한 여지를 내포한다. 부분으로 분할되었다가 차이를 가지는 반복으로 다시금 집합되는 구성형식은 이러한 상호작용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에 대한 글에서, 기억 그 자체는 도시와 유사하게 재현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거리와 골목길의 복잡한 망은 얽히고설킨 기억의 실과 유사하며, 도시 환경의 열린 공간은 망각된 것들의 공허한 빈자리와 유사하다. 기억과 도시는 시각도 끝도 없는, 끊임없이 보강해야 할 미로의 형상을 이룬다. 과거로의 여행은 멀리 떨어진 곳으로의 항해이며, 기억속의 움직임은 미로 속의 움직임과 유사하다. 미로 속의 움직임은 늘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회상은 미래를 지향하기에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우리가 움직일 때 시간은 뒤에 머무르지 않고, 미로의 공간처럼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도 끊임없이 되돌아오기에, 우리는 시간을 다시 만나게 된다. 시간 속의 기억은 공간 속의 미로에 상응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써진 벤야민의 글처럼, 전기숙의 작품은 진보나 발전의 재현과 관계되지 않은 특성상 그자체가 미로가 된다. 여기에서 기억은 끝나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회상이다. 벤야민은 ‘누군가 여행길에 오르면 그는 무언가 얘기할 거리가 있다’는 독일의 속담을 인용하면서 이야기꾼은 의식적 회상, 즉 의지적 기억의 능력에 의지한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의 작가는 의식에서는 지워졌지만, 무의식이 보존하고 있는 무의지적 기억의 파편적이고 이질적인 자료들 역시 활용한다. 기억하려는 작가에게 경험만큼이나 기억의 직조는 중요하다. 육각형에 자리한 부분적 영상이 단편적 기억을 상징한다면, 그 사이로 난 간극들은 망각의 영역이다. 전기숙에게 기억은 이 불연속의 지대까지 포함된 잇기와 엮기의 작업이다. 분열된 시공간 속에 지각과 행동이 흩어져 있다. 들뢰즈는 ‘간격의 한쪽 끝에는 지각-이미지가, 다른 쪽 끝에는 행동-이미지가 있으며, 감정-이미지는 간격 자체다’고 말한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에서 차용한 공식에 따르면, ‘행동이 시간의 주인인 바로 그만큼, 지각은 공간의 주인’이다. 영화를 통해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지각이 대상을 공간 내에서 움직이지 않는 무수한 단면들로 규정하는 반면, 의식은 대상을 시간 내에서 끊임없이 전개되는 지속으로 재통합한다고 말한다. 화면상에서 또는 캔버스 상에서 이루어지는 기하학적 공간 분할은 들뢰즈의 ‘결정체적 기호(Hyalosigne)’와 연관된다. ‘냉동된 기억’은 비유적으로만 결정체적 입자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전기숙의 시간-이미지가 결정체인 것은 그 다면성 때문이다. 결정체적 기호는 유기체적 기호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의하면 유기적 체제에서 사유함은 자기 동일적인 존재를 지향하는 동일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반면 결정체적 체제에서 사유함은, 지속적으로 열리는 생성 내에서 차이와 비동일성을 통해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유기적 묘사는 대상의 독립성을 상정한다. 그러나 결정체적 묘사는 대상을 대신해 지속적으로 그것을 지워나가는 한편, 대상을 새로이 창조하고 마찬가지로 적절한 또 다른 묘사로 대체되며, 이는 앞서 묘사를 변경하거나 심지어는 그와 모순될 수 있다. 결정체적 묘사에서 이미지는 대상을 통해 유기적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탈구성 되고 다양화된 대상을 구성하는 묘사가 된다.

묘사된 대상은 형태를 잃고 새롭게 창조됨으로서 대상이 고무하는 정신적 그림을 확장하고 심화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전기숙의 총체화 할 수 없는 풍경은 중심이 해체되어 있지만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한다. 사진으로 붙박힌 듯이 고정한 시공간의 단면들은 전체를 이루며, 이미 존재했던 것의 확인이 아니라, 새로운 것의 지속적인 창조가 된다. 육각형들로 프레임 화 된 작품에서 전기숙의 작품에서 시간의 기호들은 단순히 집합되어 있는 전체일 뿐, 전체와 부분 사의 관계가 꽉 짜여져 있는 총체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의하면 들뢰즈는 전체가 열림, 즉 아무리 큰 집합이라도 각각의 집합이 자족적으로 닫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간격의 양면은 운동을 변형함으로서 새로운 운동을 산출한다. 전기숙의 작품에 선명한 시간 기호(chronosigne)는 쏘아진 화살이나 흐르는 물로서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치적 단위, 어떤 식으로든 파편화할 수 있는 간격들로 측정되는 미적분학으로’(로도윅) 제시된다. 분리된 시공간은 제자리에서 진동하며 자리를 바꾸는 잠재적 운동감을 가지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기숙은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의 가변성을 표현한다.

 

Excerpts from the catalog essay, Congregated Particles of the Memory

 by Lee Sun-young, art critic

The scenes dismantled with hexagons are impossible projects to restore the context of experiences with spatial, temporal distances. They appear partly accurate but entirely obscure in the context as a whole. The interstices among hexagons are cracks intrinsic to lost space-time. The artist and the viewer lose their way in these cracks. The scenes are seen from the viewpoint of “someone strolling in labyrinthine memories” (Graeme Gilloch) as Walter Benjamin reminisces about the city of his childhood. In Walter Benjamin and the City, Graeme Gilloch points out that Walter Benjamin’s past is not only endless and irrevocable, but open and modified in the present. In Jeon Gi Suk’s work, uncertainty inherent in a segmented vision is extended to unknown space-time, going beyond the past and the present. One’s memory, including childhood memory, cannot be a stable genesis, and it is thus impossible to recover memory completely. What one summons through their work cannot be perfectly recovered.

Vaguely familiar scenes represent the point of view in which one becomes a stranger even to themselves. The viewpoint of children who cannot grasp objects accurately is preserved in these scenes. Many places and memories blend into each other. A place is gradually modified by memory, and vice versa. Places and memories are open to modification. The form of composition in which a scene is divided into parts and the parts are reassembled in repetition with a bit difference is the way of representing such interaction. Gilloch in his essay on Walter Benjamin comments that the memory itself is reproduced in a manner similar to that of reproducing a city. For the author, an intricate network of alleys in the city is akin to the entangled thread of memories, and an open space is similar to an empty place of forgotten things. Memory is a constantly shifting maze with no beginning or end. A journey to the past is like a voyage to a distant place, and movement in memory is like movement in a maze. The movement in a maze turns one around and brings them to the same place. Time here is not lineal.

According to Gilloch, we meet time again as time is not left behind and returns again to the initial place consistently when we move, as in a maze. The memory of time responds to a labyrinth in space. Like Benjamin’s writings, Jeon’s work is a maze without any representation of progress. Memory here is a recollection of endless moments. There is a German saying, “If one sets out on a trip, he has something to talk about.” A storyteller depends on his ability for conscious memories, that is, intentional will. Contemporary artists, however, exploit involuntary and fragmentary, heterogeneous materials their unconsciousness keeps even though they have been deleted. The weaving of memories is as important as experience for the artist who tries to remember. Partial images within the hexagons are symbolic of fragmentary memories whereas interstices among them are the territory of oblivion. Remembering something in Jeon’s work is an act of joining and weaving in a place of discontinuity. Perceptions and actions are scattered over divided space-time. Gilles Deleuze argues “There is the perception-image at one end of space, the action-image at another end of space, and the affection-image is space itself.”

According to the formula Deleuze appropriated from Henri Bergson, “if action is the master of time, perception is the master of space.” David Rodowick addressing the problem of memory through films claims in his book Giles Deleuze’s Time Machine that while perception defines the object as innumerable cross sections immovable in space, consciousness reintegrates the object as continuity within time. Any geometric division of space made on a scene or a canvas is associated with Deleuze’s hyalosigne (crystal-image). The crystal particles “frozen memory” has are not all it can have in only a figurative sense. Jeon’s time-image is one of crystals due to its multipronged approach. The concept of crystal signs is in contrast with that of organic signs. In Giles Deleuze’s Time Machine, Rodowick suggests thinking in an organic system is to discover an identical identity seeking being while thinking in a crystal system is to create concepts through difference and nonidentity within constantly occurring creation. Any organic depiction postulates an object’s independence. However, any crystal depiction constantly deletes and newly creates objects. It can be replaced with another depiction. Another depiction may modify its previous depiction or is even contradictory with this.

Portrayed objects may lose their original form and expand and deepen spiritual pictures they encourage as they are newly created. The scene Jeon cannot totalize in this way leaps to another dimension beyond the past and the present despite its destructed center. The cross sections of fixed space-time, that seem captured in photographs, form the whole as the constant creation of new things, not as the confirmation of preexisting things. In Jeon’s works with hexagonal frames temporal signs are merely a whole formed through aggregation. They do not have any totality through which whole and part are well woven. According to Deleuze’s Time Machine, Deleuze sees every whole remains open, that is, each assemblage – no matter how large it is – remains open voluntarily. The both sides of space generate a new movement through the modification of movement. Vivid chronosigns (chronosigne) in Jeon’s work are not compared to a flying arrow or flowing time but are presented as “infinitesimal calculus measured by some numerical unit or the space that can be fragmentized in any way” (Rodowick) Divided space-time has the sense of potential movement, oscillating in place. Through this process, Jeon represents variability in the present and future as well as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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