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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숙: 파생된 시간, 기억의 층위를 그리다.

 

김미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기획&비평)

 

전기숙의 회화는 사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습관적으로 일기를 대신해 하루의 일상과 풍경을 기록해 오고 있다. 인상파의 화가가 매순간 변화하는 풍경을 그리는 것처럼 그는 사진을 찍어 기억을 저장한다. 이후 그림의 소재를 선택할 때 기억의 저장소 앨범인 컴퓨터 파일에서 사진을 선택한다. 사진은 명백하게 화가 자신이 찍고 싶은 상황으로 선택한 시간과 공간을 저장했지만 기억은 완벽하게 떠올릴 수 없다. 사진이 기억의 단편인 것을 기인해 작가는 당시의 내러티브로부터 새로운 연극적 상황까지도 설정하는 것을 즐긴다. 전기숙은 사진이 가지는 기억의 단편적 장착을 포함한 은유적 내러티브와 사실적 재현만이 아닌 개입된 상상력의 세계를 회화만의 물감과 붓질로 물질화시키고자 회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다. 회화의 화면은 육각형의 단면들로 구성되는데 형상은 단면 안에서 순차적인 파편으로 그려져 시간성을 드러내 보인다. 당시 찍었던 일상의 채택된 장면은 완전한 기억보다는 파편화되면서 사건의 경과들이 순차적으로 드러나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며 화면을 다이내믹하게 움직인다. 또한 화면전체는 하나의 상으로 포착되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시각 이미지가 아니라 만화경이나 곤충, 혹은 인간과 다른 것들의 관점처럼 전통적 시지각적 해석을 벗어나 있다. 화면의 몇 부분에서는 정확한 형상을 드러내고 그 주변으로 점차 흐릿하게 배경에 흡수되어 가장자리 단면들은 추상적으로 구성된다. 이런 표현은 모호한 시간적 경험의 층위를 나타내며 심리적 상황을 대입시켜 감각적으로 변해 화면을 전체적으로 근원적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은 또한 한 화면 안의 육면체부분들이 독립된 작은 캔버스로 각각 그려지며 벽면과 전시공간을 배경삼아 설치되어 공간전체를 비실재적 회화공간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의 다른 관점과 형태 분할, 해체, 추상과 구상, 회화의 틀 안에서의 틀 만들기 등의 실험은 비디오 영상시대에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최근작 <Mr.1933과의 조우-발견된 기억>시리즈는 그가 프랑스 여행 중 벼룩시장에서 아주 작고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오래된 개인 앨범을 발견하고 그 사진과 현재 자신의 일상적 드로잉을 혼합하여 그린 작업이다. 1932년과 33년 동안 앨범의 주인공이 여행을 하거나 일상의 모습을 담고 섬세한 펜글씨로 날짜와 장소를 기록한 낡고 바랜 사진첩은 주변인물, 건물, 장소, 상황 등 그 시대 안에서의 타인의 삶의 흔적을 낭만적인 향수로 바라보게 하는 매력적인 소재로 자연스럽게 기억의 확장에 관해 작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발견된 타인의 기록으로부터 현재의 드로잉으로 덧입히거나 회화의 부분적 요소들을 접목시키며 다양한 기억의 층위를 조합해 새로운 드라마를 만든다.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들어가 일체된 삶과 문화를 담고 있는 인물과 장소는 현대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정보로서 익숙하여 낯설거나 이국적이지 않다. 그러나 파편들의 조합은 모든 기억 안에서 함몰된 여정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다.

전기숙은 시공간의 간극으로 연결된 사회적 정체성을 수평으로 누운 작은 직사각형 형태의 일정한 붓 터치로 동일한 시공간이 될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사실적 형상을 드러내고, 추상적 형상을 이입하고 때로는 그 위를 덧칠해 지워버리는 배경과 형태의 관계는 기억과 상상력처럼 서로를 도와 화면을 풍요롭게 만들어 나간다. 과거와 현재, 서양과 동양, 타인과 자신, 역사와 일상 등 시공간의 차이를 떠나 만난 요소들은 사실적 표현, 추상적 형태, 붓 터치, 물감의 질감 등의 여러 회화의 조형언어들로 전환되어 심리적인 현실로서 다시 존재하게 한다.

그의 회화는 시간과 공간의 공존기억의 층위를 그려내 인간의 깊은 곳으로부터 진실한 부분을 조우하게 한다.

 

현재와 과거로부터 온 인물이나 풍경의 기록적 형태는 여백이나 비정형적 지역과 어울리는 부분으로 접합 되고 무작위로 들어온 기학학적인 형태와 마찬가지로 화면 안에서 조형적 형태로만 존재한다. 낭만과 우연, 애매함, 모호함 감성과 실제의 존재감의 혼합은 서로의 대립과 조화를 이루며 그 안에서 화면은 새로운 형태의 균형을 이룬다.

전기숙은 다양한 감각으로 시간의 간극을 보여주며 무한 확장하는 방사적인 이 시대의 새로운 회화를 시도하는 실험적 작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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